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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서양건축사

이태리 밖에서의 르네상스, 매너리즘, 그리고 바로크(6) - 영국 바로크(2)

by 이깜깜 2022. 12. 12.

크리스토퍼 렌의 출현

이니고 존스가 죽은 지 14년 뒤인 1666년, 런던의 구도심이 대부분 화재로 소실되었다. 13000개의 집과 87개의 교구교회들이 파괴되었는데, 그때 옛 중세 시데의 세인트 폴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세인트폴 교회 -  크리스토퍼 렌

렌은 이미 대화재 이전에 옛 세인트폴의 위험한 상태에 대해서 자문을 해준 바 있다. 화재후에 남은 잔재들이 재생될 수 없다고 결정되었을 때, 렌은 전반에 걸친 일련의 계획들과 모델들을 준비했다.

여기서 가장 유명한것이 그레이트 모델로서 흔히 '렌의 최상의 설계'로 불러진다,

렌의 그레이트 모델

이 모델은 우리를 곧바로 집중식 평면에 대한 이태리식 논쟁으로  넘어가게 했다. 그레이트 모델은 서쪽에 거대한 베스티 불(현관과 같은 공간)을 가진, 세련된 8 각형 돔을 올린 것이었다. 하지만 이 안은 실현되지 못하고 희망 없는 타협이 되고 말았다. 기다란 네이브, 기다란 챈슬과 아일들을 가진 중세적 평면을 바라는 성직자들의 요구와 이태리식 바로크의 모방인 압도적인 중앙 돔에 대한 렌의 열망 간의 타협이었다.

타협된 평면

궁극적으로 사제들은 그들의 평면을 가지고, 건축가는 그의 돔을 가지게 되었지만, 싸움의 상처는 여러 곳에 남아 있다. 측면 아일을 갖는, 볼트로 축조한 높은 네이브는 플라잉 버트레스가 필요했다. 바로크 어휘에는 이러한 플라잉 버트레스가 없다. 렌의 버트레스들은 부끄러운 조그마한것이지만, 아일의 지붕 위로 나타나게 됨으로써 아일의 바깥 벽체는 그러한 버트레스를 감추기 위해서 네이브를 전체 높이까지 올려야 했고, 이 변형은 돔 갤러리나 공중에서 바라볼 때 너무나 명백하게 보인다. 퓨긴의 '세인트 폴'의 절반은 다른 절반을 감추기 위해서 지어졌다는 조롱은 과장되긴 하지만 전부 그렇지는 않다. 

 

돔 그자체는 유럽 바로크에서 가장 훌륭한 것들 중의 하나이다. 세인트 페테에서와 같이 어쩔 수 없이 돌출되는 네이브는 서쪽에서의 돔에 대한 조망을 가로막는다. 그럼에도 그 당시로서 렌은 런던 전체를 압도하는 돔을 설계했다. 


건축가 벤브러

크리스토퍼 렌의 재능이 수학적이라면, 벤브러는 극적이고 낭만적이며 거의 인상파 적이었다, 그는 영국의 바로크양식을 성숙시켰다, 그의 저택들은 강건한 로마식 상세 (둥근아치로 된 로마의 집착) 와 영국식 경관속에 완벽하게 자리잡은 낭만적인 성곽들이었다.

블렌하임 궁전 - 벤브러

1704년 프랑스 군대는 다뉴브 강과 블렌하임 마을 근처에서 말로보 공작 연합 구에게 패한다. 말보로는 -블렌하임 궁전- 을 선물로 보상받았는데 영국에서 가장 큰 주택의 하나였으며, 건축가  밴브러를 자신의 건축가로 지목했다. 

 

하워드 성  - 벤브러

하워드 성은 로마식 허세와 엔 여왕의 영식이 환경을 아주 잘 상징하는 거대한 귀족 주택들의 효시를 만들어 냈다. 

거대한 주택으로서, 멀리 뻗어져 나가는 날개들과 정원들의 전개에 의해서 더욱 광대하게 보이도록 사력 깊게 만들었다,

중앙의 주 블록에는 돔이 있고, 거대한 필라스터들은 건물 전체 높이로 올라가며, 그것들 사이 벽면의 러스티케이션에 의해서 강조된다.